테크리드 오답노트

나의 길 / 나의 답

dxnlab 2026. 9. 16. 19:51

곧 추석입니다. 지난 주를 거치며 개인 신상에 약간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좀 민감한 단계인 듯 하여 — 당초 적어 둔 글이 있었는데 민감한 주제가 될 수도 있어 좀 더 미뤄 둘 예정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더 가다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긴 연휴를 앞두고 이번에는 테크리드라는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네네 알고 있습니다 보통 재미 없는 원론적인 주제입니다. 그래도 아마, 연말 연초 정산하고 계획 수립하다 보면 아주 흥미진진할 겁니다. 거의 책상 정리만큼.

 

“팀장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팀장 직함으로 일을 하고 있던 무렵에 한 친구가 질문을 준 적이 있습니다. 뭐, 반면교사가 필요해서 물었겠지요. 나의 답은 대충 이랬습니다:

“울타리와 놀이터의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자리라 생각합니다”

조직을 대표하고 / 외부와의 연결 접점이 되는 자리로서, 리드는 일차적으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그 내부를 보호해야 합니다. 또한 역할/책임의 한계를 그림으로써 정책적인 가이드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울타리입니다.

개인의 입장으로 스스로의 일만 책임지면 참 홀가분하고 좋습니다 (다들… 아닌가요? 나만 그런가?). 하지만 개개인이 갖고 있는 시간과 인력의 한계를 넘어 서려면 결국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몇 사람이 되었던 팀으로 조직이 구성된다면 그 개인의 역량에 무관하게 — 설령 나머지 조직 전부를 합친 것 보다 그 개인의 능력이 더 높더라도 — 조직 전체의 역량에 발맞추어 움직여야 합니다.

일종의 함대 운용과 비슷합니다. 전체 함대의 속도는 함대 전체에서 가장 느린 배의 속도에 따라 좌우됩니다. 정 급하다면 크고 빠른 배가 작고 느린 배를 끌어 속도를 올릴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쾌속정이 순양함을 끌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번거롭게 함대를 가져가야 하는가 하면, 언젠가 상황이 벌어진다면 함대 전체의 각 기능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이동 속도가 함대의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직 운용에 대한 재미난 비유라 생각합니다.

개중에는 간혹 항공모함이나 이지스처럼 압도적이고 종합적인 제압 능력을 가진 인원도 있습니다. 순양함처럼 안정적으로 한 사람 몫을 하는 시니어들도 있고, 잠수함이나 탐사선 같은 특수 목적의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탐지선, 통신/연락선, 보급/운반선, 병원선처럼 공통 목적에서 다소 벗어난 듯 보이는 이질적인 기능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이런 이질적인 기능들은 함대 전체의 역량 범위를 크게 넓히며, 균질한 조직이 가질 수 있는 취약점을 보완해 줍니다.

결국 조직으로 움직일 때 그 조직의 역량이란, 조직 구성원 각자가 얼마나 날뛰어 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만큼 돌아온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드는 조직원들이 안심하고 날뛸 수 있는 기반, 놀이터 playground 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팀워크 같은 허울 좋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 개인의 조직적인 개인 플레이가 팀플레이를 만든다”
— <공각기동대>에서 발췌

나는 조직 운영의 이상을 애니메이션에서 봤습니다. 고전적인 조직 운영 기법에서 리드는 조직을 통제하고 조율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디렉터/지휘자의 역할을 맡습니다. 대체로 대기업과 같은 대규모 구조적 조직에 적합한 방식입니다.

분명 모든 조직 구성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고, 제 아무리 뛰어난 소수 정예의 조직이라도 이런 체계화 된 대형 조직에 대한 한계는 있습니다. 어느 쪽 조직이 더 낫고 우월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기질이 대규모의 체계화 된 조직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불편해 해서 잘 맞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몸 담고 잘 운용할 수 있는 것이 소수로 구성된 강한 역량의 TF인데, 이런 소규모 조직에서 팀을 위한 희생이니 팀워크의 발맞추기 같은 소리를 한다면 작은 규모의 장점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조직이 운영되려면, 각 구성원이 공통의 목표를 두고 자신이 담당한 자리에서 서로를 지원하는 연결된 점조직의 형태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게, 참, 만화 같은 이상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데 — 개인적으로 이런 이상적인 조직으로 움직여 본 경험이 있습니다. 기업 조직은 아니었고 우리 스스로도 돈 벌려 하는 일이면 이렇게 못 한다고 자조하긴 했습니다만, 이상적인 조직 구성/운용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니 생각을 달리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테크리드와 울타리/놀이터의 주제로 돌아와 봅시다. 구체적인 목표가 뚜렷한 SI성 업무, 혹은 안정성이 필요한 운영 업무의 대형 기술 조직들에서는 분명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험성/실험성이 강한, 새로운 문제 해결의 돌파력이 필요한 소수 TF 조직에서는 조직 구성원 개개인이 1인분 이상으로 날뛰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리드는 구성원 개개인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며, 명확한 한계와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차고 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 밑바탕이 주어진다면 성과는 구성원들의 팀플레이가 연결되어 스스로 만들어집니다. 설령 리드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Tech Lead 라는 말을 곰곰히 뜯어 보면 — (조직의) 기술을 이끄는 사람, 기술로써 이끄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한국말 뉘앙스가 참 재미난 것이 조사 한 두 글자 차이인데 그 의미가 이렇게 다릅니다.

이끌어 가는 방법이 상석에서 통제하고 지휘하는 방식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그와 같은 방법이 필요한 조직 구조도 존재하지만, 다분히 고전적이고, 그만큼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라 생각합니다. 조직의 성격/목표/여건에 따라 조직 구성/구조/운영 방침에는 수 없이 많은 답들이 존재하며, 특히 현대에 많이 필요한 모험성 기술 조직들은 대체로 소수 정예 전위대Avant-garde와 같은 실험적 TF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니 대규모의 구조적인 지휘Hierarchical — Orchestration 방법을 가져오면 필연적으로 오답이 됩니다.

해서 나는, 전위대적인 테크리드로서 울타리를 치고 놀이터를 다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썩 훌륭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내가 리드로서 해 온 일들은 대개 그 틀에서 해석 가능합니다.

다만 — 오답노트라는 제목처럼,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져 준 친구들에게 했던 이야기처럼 그 답이 하나일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습니다. 나 스스로의 기질, 성향, 장점과 단점을 시장 여건과 전반적인 흐름에 맞추어 보았을 때 지금은 이런 답인 겁니다. 모르죠, 나도 크고 안정적인 기술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면 분명 다른 답을 내놓을 겁니다. 구시대적 군대식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은, 또 나와 다른 그 자신의 정답을 만들어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끔은 나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친구들이 앞으로 만들어 갈 정답이 궁금해서 미리보기 결제하는 듯한 두근거림을 가져 봅니다. 분명 내 예상을 넘어, 앞으로 나의 모자람과 편견을 일거에 박살 내 줄, 새로운 답을 만들어 가는 친구들이 있겠지요.

심히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