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 부당함에 대하여
비록 가정형편은 유복했으나 성질머리는 그렇지 못하여 유순하게 살지 못한 편입니다. 결혼을 전후로 나에 대한 외부 평가는 거의 극과 극을 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나이 먹고 할 말은 아니지만 뜻대로 이루어진 일은 손에 꼽을만 하고, 세상이 나를 참 싫어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매일 같이 고민했고, 과연 미래라는게 있을까 두렵기만 했습니다.
뒤에 오는 친구들에게 과연 위로가 되는 말일까 모르겠습니다만, 나이 먹는다고 사람이 크게 달라지는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웬만해서 뜻대로 안 되는게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 들이게 되고, 세상이 나를 싫어하긴 하는데 나만 싫어하는 것도 또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따위로 살아도 괜찮을까 고민도 들지만, 안 괜찮으면 또 어떻습니까. 내가 뭐라고. 그렇게 가다 보면 오늘이 어제가 되더랍니다. 약간은 성장 같은 것도 하는가 싶고. 그냥 성질 부릴 기력이 떨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은 원래 불공정하고 부당합니다”
같은 생명인데 누구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대장균으로 태어납니다. 어떤 짐승은 인간이 보기에 좋다는 이유 하나로 거둬서 먹이고 재우고 번식까지 시켜 주는데, 다른 쪽 짐승은 그저 살아갈 뿐인데 인간 눈에 띄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합니다.
그런 자연의 불공정함이 때로는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 자연 법칙이라는게 그렇게 생겨 먹었고, 우리 생명 하나하나는 그렇게 정해진, 필연적인 운명에 최대한 저항하고 있습니다. 살아 간다는 것은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운명에 맞서 자신의 생의지를 연장 시켜가는 — 어찌 보면 정말로 미약하고 쓸모없는 — 소모적인 투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살아가야 하는가, 묻는다면, 살아 있으니까요. 그게 생명이니까요.
그 저항이 모이고 쌓여 인류의 문명과, 역사와 과학을, 그리고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인류 역사조차 사소해지는 아주아주 크고 긴 흐름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부질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꿀벌들이 인간님네 보시기 좋으라고 집 짓고 꿀 채우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당면한 모든 운명에 저항합니다.
생의 부조리함에 대한 경험은 그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가르는 듯 합니다.
“나만 당할 수 없다” 또는 “나로 끝낸다”.
개인적으로 뒤의 태도를 가지려 노력합니다. 노력한다는 말은,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앞의 태도로 기울기 때문에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어른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의 그 어른들 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 어린 시절처럼 큰 소리로 맞서지 못하는 것은 — 내 생각과 내 지식이 닿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내 능력과 내 힘이 더 작고 미약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여러 부당함에 기대 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겁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저항이 포기하고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내 실패를 참고해서 새로 도전하면 됩니다. 원래 그런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패배 경험 하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새로운 도전을 비웃고 가로막는 것은, 나만 당할 수 없다며 떠넘기는 것은 비겁한 태도입니다. 이제는 제대로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른들 참 비겁하게 살고 뻔뻔하게 떠든다고.
The buck stops here. 삶의 여러 측면에서 부당함은 수시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오늘도 애써 이겨내는 모두를 응원합니다.